전두환 전대통령 사망, 뉴욕타임즈 특집기사 전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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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남한의 전 군사독재자 90세에 사망

최상훈기자(Choe Sang-Hun,뉴욕타임즈 서울지국장)

Nov. 22, 2021

쿠데타로 집권하고 1980년대 대부분을 철권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낙하산병과 장갑차를 파견하여 수백 명의 민주화 시위대를 진압했던 한국의 가장 비방받는 전 군부 독재자 전두환이 화요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90세였다. 그의 죽음은 한국 경찰청에 의해 확인되었다. 퇴임 8년 후인 1996년, 전 씨는 1979년 쿠데타와 이듬해 광주에서 시위대 학살을 일으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전씨는 1997년 전두환의 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반체제 인사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화해의 표시로 사면됐다. 1979년부터 1988년 초까지 통치한 전 씨는 또한 세금 감면 및 기타 정부 지원의 도움으로 재벌로 알려진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연결된 가족으로부터 수억 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전씨는 한국의 장성 출신 대통령 3명 중 마지막으로 사망했다.

3명의 군인 장성이 통치했던 32년 동안 한국은 1950-53년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부상하여 산업 생산량과 국민소득에서 라이벌 북한을 제치고 아시아의 호랑이 경제강국 중 하나로 부상했다. 전두환이 집권하는 동안 한국은 만성 인플레이션을 극복했고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여 연간 평균 1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의 정부는 또한 한때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서 벗어난 축제로 널리 알려진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하기 위해 역사적 적인 일본에 대한 거대한 역경을 극복했다.

그러나 전씨는 대부분 독재자로 기억된다. 최진 대통령 리더십연구소 소장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독재적인 군부 독재와 동의어”라고 말했다. “그의 긍정적인 업적은 그의 부정적인 유산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즉, 그가 권력에 올랐던 불법적인 방식과 그의 임기 동안 이어진 독재 행진입니다.”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현재 남한의 남쪽에 있는 합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아버지 천상우가 채권추심원과 일본 경찰로부터 쫓겨난 반면 어머니 김점문은 네 아들 중 두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공인된 자서전 “전두환: 운명의 사나이”에 따르면 불교 점쟁이가 세 개의 튀어나온 앞니가 소년의 영광의 길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예측했을 때 부엌으로 달려가 집게로 그 치아를 뽑았다. 이책은 그의 쿠데타 이후에 출판되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등록금을 내지 못해 대학을 포기한 두환. 대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복싱을 연습하고 골키퍼로 축구팀 주장을 맡았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경기 중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게임 전략을 지시하곤 했다.

1979년 말 전두환 장군은 첩보원인 K.C.I.A 소장이 술자리에서 박씨를 암살했을 때 군의 정보사령부 사령관이었다. 전씨와 그의 군대 친구들(대부분은 고향 남동쪽 출신의 노씨와 같은 장교)은 그들의 상사이자 계엄령인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육군참모총장으로 옮겼다. 그들의 군대는 서울로 진격하여 대체로 무혈 쿠데타를 완수했다. 정 장군은 훗날 “전두환의 개인적 탐욕을 채울 목적으로 벌인 더러운 반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씨의 측근들이 자신이 박씨 암살에 가담했다는 거짓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채찍질을 하고 물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국가를 계엄령 아래 두었고 의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두 명의 주요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을 포함한 저명한 반체제 인사들을 구금했다. 1980년 5월 김대중의 정치적 본거지인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군대는 지휘봉과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서에서 훔친 무기로 무장했다. 진압으로 군인과 경찰관 26명을 포함해 공식 집계에 따르면 최소 191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사망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말했다. 전씨의 군부는 이후 북한의 명으로 광주항쟁을 선동했다는 거짓 누명을 씌워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국에서 근무한 전직 미국 외교관 데이비드 스트라우브(David Straub)는 “이 사건은 한국의 전체 젊은 세대들의 생각을 확고하게 만든 분노와 비극으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주재 미국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2015년에 쓴 ‘한국 민주화의 반미주의’에서 이렇게 썼다. 젊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미군 장성들의 작전 통제하에 군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 학살을 막지 못했다는 워싱턴의 인식은 배신의 증거였다. 나중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전두환의 인권 유린에 대한 ‘조용한 외교’는 전두환 아래에서 한국인들이 겪는 고통을 미국이 무시했다는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했다.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반미주의는 수십 년 동안 격렬했다. 학생 활동가들이 미국 외교 시설을 급습해 한 곳을 불태웠다. 미군 기지는 “양키, 집으로 가라!”라고 외치는 시위대에 시달렸다. 워싱턴은 전씨의 쿠데타에 의해 방심했고 광주에 배치된 군대는 당시 미국 당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씨의 계엄령을 비판하고 광주에서 자제를 촉구했지만, 정부가 통제하는 한국 언론들은 미국이 전씨의 광주 파병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스트라우브는 전두환이 “한국 국민뿐 아니라 미국도 조종했다”고 적었다.

2016년 한국 월간지 신동아에 실린 드문 인터뷰에서 전씨는 광주에서 총살 명령을 내린 것을 부인했다. 그는 스스로를 정치적인 “복수”의 희생자라고 불렀다.그는 잡지에 “나는 광주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군인으로서 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나라를 보았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학살 이후, 전씨는 친정부 대표들로 가득 찬 선거인단에서 스스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정부가 매일의 “언론 지침”으로 통제하는 소수의 신문과 TV 방송국으로 국가의 뉴스 미디어를 폐쇄하거나 합병하도록 강요했다. 황금 시간대 TV 뉴스는 항상 전씨의 일상에 대한 보도로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외모가 비슷한 한 개그맨을 전씨와 비교하기 시작하자 그 개그맨이 TV에서 쫓겨났다. 둘 다 대머리였다. 반체제 인사, 학생 활동가, 언론인들은 고문실로 끌려갔다. 전씨의 ‘사회정화’ 프로그램에 따라 정부는 폭력배, 노숙자, 반체제 인사 등 사회의 건강에 해로운 요소로 간주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검거하여 잔혹한 재교육을 위해 병영으로 이송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수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1983년 전씨가 현재 미얀마로 알려진 버마를 방문하던 중 암살을 시도했다. 북한은 요원들이 설치한 폭탄으로 당시 버마의 수도였던 양곤(구 랑군)의 순교자 묘를 파괴하고 21명을 살해했다. 한국의 여러 장관들도 사망했다. 전씨는 도착이 늦어져 공격을 피했다.

별로 인기가 없었던 전씨는 자신의 후임자인 노 씨를 같은 선거인단에서 선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문당한 학생 운동가의 죽음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 속에서 그와 노 대통령은 대중 선거에 참여했다. 노 대통령은 16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두 반체제인사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에 야당 표차가 크게 갈라진 덕분이다. 규칙. 전씨는 자신의 처벌을 요구하는 대중을 달래기 위해 외딴 불교 수도원으로 국내 망명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이 집권한 후 전씨, 노무현 등 전직 장군들은 한때 불가촉천민으로 여겨졌던 인물들을 뒤쫓았다. 전씨의 서울 자택 경비를 맡은 고위 경찰은 전씨가 화요일에 아내 이순자씨의 도움을 받으며 화장실로 가던 중 쓰러졌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외에 재용, 효순, 재국, 재만 등 4명의 자녀가 있다.

1997년 대법원 판결에서 전씨는 뇌물을 통해 불법적으로 축적한 2,200억 원(1억 9,000만 달러 상당)을 국가에 반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벌금을 낼 만큼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그가 친척을 돌보는 데 자산을 숨겼다고 비난했다. 검찰은 냉장고와 개 두 마리를 포함해 가능한 모든 것을 압수하기 위해 그의 집을 수색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액수의 절반만 회수했다.

2000년 AP통신 기자로 활동할 때 한국전쟁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사건을 보도한 ‘노근리사건’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최상훈 뉴욕타임즈 서울지국장은 남한과 북한에 관한 뉴스를 주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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